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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에서 온 편지 (17)
더페스티벌    2011-05-15 죄회수 3,701 추천수 0 덧글수 2  인쇄       스크랩     신고

 

(폭우속의 농심, 폭우는 내려도 농심은 쓰러지지 않습니다. 폭우를 뚫고 물고를 보러 나오신 할머니)


 

매실, 개선장군으로 오월성에 입성하다!




3월의 찬바람도 달구어 냈던 매화를 기억하시는지요?


유난히도 모질었던 지난 겨울에도

매화나무가 얼어 죽었다 거나 매화꽃이 추위에 떨어졌다는 말 듣지 못했습니다.


금산에서 오신 분들의 얘길 들으니

그곳에는 대나무가 동사해서 붉게 타 버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 하동의 대나무들도 제 색깔을 갖지 못한 듯 보였습니다.



겨울에 피는 동백나무는 어떤가요?


선배들 졸업식이 다가오는 날이면 이웃 동네 울타리 동백나무를 몰래 베어다

밤새도록 꽃다발 만들었던 겨울의 화신 동백나무도

지난 겨울에는 제대로 배겨내질 못했습니다.


녹차는 또 어떻습니까?

70%이상이 동해를 입었고 녹차가 아니라 붉을 적자를 써서

적차(赤茶)라 불러야 할 정도로 지금도 붉게 변색되어 있습니다.


그 와중에서도 유독 매실나무만이 화려한 꽃으로 환생하여

마치 봄의 출정식이라도 거행 하는 듯한 면모를 과시했었습니다.


그 매화가 전쟁터를 향하여 떠난 지 불과 두 달 여 만에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 온 것입니다.


그 당당함, 그 푸르름, 그 완벽한 변신,

동백, 대나무, 녹차와 같은 기라성 같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매실이 봄의 화신에서 초여름 오월의 개선장군으로

입성을 하고 있습니다.

 

(한참 물이 오른 매실, 앞으로 보름만 지나면 수확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김병종교수님의 바보예수, 심센은 꼭 바보예수를 닮았습니다)

 

성자 심센



"나는 미래의 희망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을 먹고 산다"

제가 자주 주변 분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미래를 향한 큰 포부와 꿈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부끄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미래를 향한 원대한 포부가 아니라

동심의 세계에서 겪었던 어릴적 추억인 것 같습니다.


저의 아내도 지리산과 덕유산 정기를 받고 태어 난 함양댁입니다.

중학교 때 함안으로 전학을 가서 성장했지만

늘 어렸을 때 철모르고 놀았던 그곳의 추억을 되 뇌이곤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계곡에서 멱을 감으면서 바위에서 비닐포대타고 내려가다가

옷이 닳아 찢어진 사건,


얼마나 바위를 탔으면 구멍이 났겠습니까?

헤헤! 생각만 해도 우습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힘이라고 합니다.


한 번 씩 지금 크는 아이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

다음에 커서 무슨 추억을 말할까?


이런 얘기들을 둘이서 나누곤 합니다.


저의 어릴적 추억은 거미가 거미줄을 풀어내듯이 술술 풀어낼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저의 머리에 지워지지 않는 한 분을 소개 하고자 합니다.


몇 년 전, 써 놓았던 글을 그대로 옮겨 봅니다.



우리는 그를 심센이라 불렀다.

칠순을 넘긴 노인도, 이제 갓 말을 배운 아이도 모두 심센으로 통했다.


심센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몇 평 안 되는

작은 외딴집에 살고 있었다.


국가에서 지어 준 집이지만

겨울에는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도 없고

여타 일체의 편의시설도 없이 단지 방 한 칸이 전부였다.


심센은 사계절이 없었다.


여름에도 두터운 외투를 입고 다녔으며

손에는 항상 지팡이와 종이조각, 신문지, 잡지 등을 들고 다녔다.


식사는 매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걸식하였다.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 어느 집도 심센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먹다 남은 식은 밥이라도 한술 차려 주었으며,

혹 밥을 다 먹고 남은 밤이 없는 집에서는

“오늘은 밥이 없으니 내일 오라”고 했다.


심센의 외모는 사상가나, 철학가, 아니면 유명한 음악가 같았다.


외투, 지팡이, 터벅하지만 정리된 하얀머리와 하얀 콧수염,

낡았지만 항상 구두를 신고 다녔다.


어린 나이에 심센에 대하여 한 가지 알고 있었던 것은

심센은 일제시대 때 항일 운동가였으며, 매우 학식이 많이 들었고

일본 사람들 로부터 고문을 받아 온전한 정신을 잃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글짓기나, 시를 지어오라는 숙제가 있으면

종이 한 장씩을 들고 심센이 사는 집으로 가서 시를 적어 받아오기도 했다.


심센은 철저한 예절가였다.


어느 누구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게 되더라도

반드시 모든 식구들에게 무릎 꿇고 큰 절로 인사를 했으며

식사를 마친 후에는 부엌에서 일하는 부녀자들과

심지어 나이어린 꼬마에게까지 감사의 인사를 하고 갔다.


나는 심센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찾아오는 심센을

한 번도 불쌍하다든지 밉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내가 군대에 입대하고 첫 휴가를 왔을 때

형님으로부터 심센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 서운함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심센은 나의 고향 면사무소 맞은편 낮은 산자락에 잠들어 있다가

대전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는 소식을 최근에야 들었다.


모습과 심성까지도 꼭 예수님을 닮았던 심센,

그는 성자였다.


(매암다원과 매암차박물관 전경입니다. 하동속의 또 다른 세계입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1호, 매암차박물관



부도덕 했던 과거는 청산되어야 하지만 말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왜곡되거나 오인되는 경우는 더더욱 막아야 합니다.


과거 역사를 부끄러운 역사로 치부하고

모조리 때려 부셔버려 역사적 교훈으로서의 보존까지도 못하게 한다면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은 비교적 새 것을 좋아하는 국민성을 가진 듯 합니다.

그 부분에서는 저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지난 해 군의 행사에 국내 정상급 오케스트라를 초청한적이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오케트스트라의 연주를 코앞에서 감상한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한 가지 느낌은 연주자들의 연령이 생각보다는 많이 낮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 씩 방송을 통해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연주회실황을 볼 때에도

연주자들의 연령이 많이 낮은 것은 다소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묵은 김치처럼, 깊은 숙성과정을 거쳐야 제 맛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닐런요?


그 숙성되고 적절히 발효된 하동의 명소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매암차 박물관입니다.



매암차박물관은 1931년도에 건립 된

조선총독부 지리산남부임업연습림장의 관사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올해로 꼭 80살이 된 건물입니다.


이를 현재 관장인 강동호씨의 조부인 강성호옹이 1961년에 매입하였으며

아들인 강화수옹이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다원을 조성하였고

2000년에는 주택에서 차박물관으로 전환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일본식 건물이라는 것에만 의미가 있지는 않습니다.

우선 이 건물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차 박물관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 차의 역사는 물론

323여점의 차 유물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하동은 차의 본고장입니다.


다행히도 이 매암차 박물관은 차의 본고장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하동의 체면을 지켜주는 보물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일본식 민박이나 까페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만

어떻게 이 건물을 차 박물관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지

그 안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물관이 전부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를 자랑하는 다원이 차 박물관을 더 가치있게 합니다.


하동에는 다원8경이 있습니다.


다른 고장의 다원처럼 화려한 다원이 아닌

천천히 뜯어봐야 보이고,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는 수고를 해야만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볼 수 있는 다원이 대부분입니다.


그 중에서 저는 대표적인 다원을 매암다원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차나무 연령이 비교적 높고 바람을 막아주는 지형 덕분에

지난 겨울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다원의 본색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다원을 관리하고 있는 강동오과장은

매암다원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지난 40년간 무농약, 무비료를 지켜냈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혹독했던 지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라는 것입니다.



매암다원이 아름다운 것은 그 절제됨에 있습니다.


순박한 다실, 자연 그대로의 야외무대와 잔디밭,

화려하지 않지만 꼼꼼하게 신경써서 배치해 놓은 작은 소품들,

모자람이 더 가치있어 보이는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곳입니다.


박물관과 다원을 찾은 서울대 미대 김병종교수님은

"대한민국 최고의 박물관이다. 어디에 내 놔도 손색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그 절제함, 색채감에 감탄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유산이 오늘날에 빛을 보게 된 것은

3대를 이어온 가문의 열정과 문화적 안목 때문입니다.


다원의 미적 관리에 까지 신경쓰기가 쉽지 않았을 시기에

선견자적 안목과 감각으로 다원을 조성하고

이를 미적, 문화적 감성으로까지 승화시킨 분들의 수고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 중심에 강화수옹이 있습니다.


올해로 82살이 되시는 강화수옹은

자택으로 쓰던 일본식 집을 차 박물관으로 전환을 시키는 일을 감행하셨고

다원을 직접 조성하는 등 매암차박물관과 다원의 실질적인 설립자입니다.


제가 방문할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자네 집이라 생각하고 손님을 잘 모셔라"며 격려해 주십니다.


며칠 전 제가 찾아갔을 때에도

직접 호미를 가지고 잔디밭 잡초를 뽑는 일을 손수하시면서

다원을 관리하고 계셨습니다.


김병종교수님은 


“이러한 보물이 있게 된 것은

우리 역사와 문화를 지킬려고 노력하셨던 어른들이 계셨기 때문이고

강화수옹을 뵙기 위해서도 하동에 자주 와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매암차박물관을 수백 번 가 보았지만

언제보다도 새로운 곳,

그 느림과 여유의 공간에 매료되곤 합니다.


하동 근대문화의 아이콘,

그러나 하동을 넘어서서 대한민국의 대표근대문화유산으로도 손색이 없는

매암차 박물관과 매암다원이 하동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










 

태그  조문환, 매암차박물관, 매암다원, 다원8경, 강화수 옹, 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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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가토   2011-05-21 21:14 수정삭제답글  신고
매실의 푸르름 당당함. 정말 느껴집니다.
DONDEMO   2011-05-16 23:47 수정삭제답글  신고
그 심센이 지금 살아서 녹차밭 한 가운데 서 있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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