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길이라고도 하는 "십리벚꽃길"의 단풍입니다. 연인들이 이 길을 걸으면 결혼에 골인한다고 합니다. 가을이 다가기 전에 손 잡고 한 번 다녀가세요)
산골 분교 훔쳐보기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배웠던 첫 노래입니다.
저만 그런가요?
엄마 치맛자락 잡고 손수건 가슴에 단 채 입학하던 날,
엄마는 저에게 딱 한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조문환" 하고 부르면 대답을 크게 해야한다 알았재?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짐을 받으셨습니다.
수줍어서 대답을 하지 못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엄마의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행히도 어디에서 용기가 나왔는지 "예"라고 크게 내 뱉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가 저를 대견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 오너라
영수야 놀자 순희야 놀자!
제가 난생처음 배웠던 글자들입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기역 니은은 물론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필수단어와 같은 것들도 전혀 모르고 입학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마다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던 기억입니다.
선생님들도 글자를 가르칠려고 그렇게 힘겨워하지 않으셨지만
1학년이 마칠 무렵에는 한글을 다 깨칠 수 있었으니
이것은 기적이 아닌지....
요새 초등학교 1학년들의 수준은 예전의 4학년 이상 수준 아닙니까?
한글은 물론 영어까지,
거기에다 피아노, 바이올린과 같은 악기들은 기본으로 ....
이미 초능력의 인간이 되어 입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추억의 교실입니다. 기억나시나요? 시험칠 때는 가방으로 담벼락을 쌓았지요)
산골 분교초등학교의 속살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늘아래 첫 동네, 왕성분교
전교생이라고 해야 유치원을 포함하여 고작 50여명,
자칫하면 폐교 또는 통합될 위기에 놓여있는 분교입니다.
운동장에 들어서니 학교는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물론 수업 중이었지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 떠드는 소리, 운동장에 나와서 뛰어다니는 어린이들도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겉모양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었지만
수업시간을 알리는 ‘학교종이 땡땡땡’은 볼 수 없었고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각종 작은 동상들과 철봉은 옛날 모습 그대로 있었습니다.
학교가 작을수록 더 많은 배려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교무실이 없어서 작은 공간에서 선생님들이 등을 돌린 채 일을 하셨으며
컴퓨터실도 한 학년의 교실의 반을 나눠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학교에는 다 있는 도서관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여
복도의 구석 한켠 책꽂이에 꽂아 놓은 책 몇 권이 전부였습니다.
사물놀이팀의 악기는 선반에 놓여있지만 찢어지고 깨어지고 낡아서
이것으로 소리가 제대로 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열정은 정반대였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취약한 환경을 극복하려는 몸짓이
그대로 보였습니다.
5학년은 모두 네 명이었습니다.
마침 과학시간이어서 과학전담선생님의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딸랑 네 명을 앉혀놓고 수업하는 모습이 제 눈에는 너무 생소하게 보였습니다.
도시에서 전학 온 윤지는 그래도 시골학교가 맘에 들어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친구들이 적어서 심심하기는 하지만...
(5학년 과학시간입니다. 하나같이 다 이쁘고 똑똑합니다. 이들의 장래에 박수를 보내주세요)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에는 말 그래도 콩나물시루였습니다.
한반에 80명이 넘었으니까요.
전교생 조회를 할 때면 운동장이 꽉 찼었고
등교 후 운동장은 크고 작은 공들 수십 개가 서로 얽혀 축구를 했었습니다.
오전수업을 마치면 재건체조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전교생이 운동복차림으로 나와 음악과 구호에 맞춰 체조를 하고
운동장을 몇 바퀴 돈 후에 점심을 먹는 일과였습니다.
당시 우리집은 부자는 아니었으나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어느 부잣집 자식 못지않았습니다.
항상 깨끗한 옷을 입혀 주시고 다른 집 자식들에게 빠지지 않게 하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저는 그 재건체조 시간이 싫었습니다. 체육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란 바탕에 하얀 줄무늬가 있는 체육복은 당시로서는 로망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체조시간,
저는 체육복이 없어 겉옷을 벗고 내복 차림으로 운동장에 나갔습니다.
오래입어 형태가 틀어지고 모양이 바뀐 내복형 체육복이었는데
그나마 고무줄이 늘어져서 한손으로는 내복바지를 잡고 있어야 했고
길이는 짧아 거의 무릎까지 올라 올 정도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얼마나 창피했는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은 모든 학생들이 저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학생은 구보를 하면서 한손으로 바지를 잡고 달리는 저를 보면서
배를 잡고 웃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구보 몇 바퀴하는 시간이 어찌나 길던지....ㅋㅋ
집에 돌아와서 엄마한테 그 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체육복을 사 낼 것을 강요 하였습니다.
다음 장날, 엄마는 시장에 다녀오시더니 하얀 체육복을 내 놓았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으시고 몇일 밤을 새워 가마니를 짜서 시장에 팔아
저의 체육복을 사신 것입니다.
(기훈이는 장난치다 다쳤는지 휴지로 코를 막고 있더군요 ㅋㅋ)
농촌학교들이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동창회 시즌이 되면 학교는 없으되 동창회는 살아 있는 기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십수 년 전에 폐교된 학교들의 동창들이 모여서 동창회를 하고 있는 모습은
학교를 사랑하고 살려 보려는 몸짓으로 보여 집니다.
남아 있는 학교들도 언제 통폐합될지 모를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학부모들은 대부분 학교가 존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작은 학교의 열악한 상황을 눈으로 목격한다면
아이들의 장래와 학업 여건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통폐합쪽으로 기우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부나 교육청에서는 물론 통폐합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효율성, 교육의 효과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통폐합이 능사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큰 학교 중심의 교육환경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 봅니다.
효율성과 효과성도 중요하지만 학교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우리도 학교가 있다’는 주민들과 학부모들의 자부심,
그리고 학교가 존속함으로서 지역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학교가 배움의 터전만이 아니라
그 이면에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늘 염두해야 하지 않을까요?
학교의 통폐합은 마치 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고 파괴되는 것과 같이
동심의 파괴와 상실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아래 첫 동네의 왕성분교,
이곳에서 앞으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나고
주민들의 추억과 동심을 지켜주는 ‘우리학교’로 남아있어 주길 소망합니다.
(왕성초등학교 사물놀이 팀의 악기가 필요합니다. 후원을 하실 분은 제게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동에서 조문환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