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됩니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집니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합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습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습니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습니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습니다.


